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제국 육군 (문단 편집) === 육군소년비행병 === 강한 항공 전력을 키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조종사, 통신사, 정비사 등 유능한 항공 요원이었다. 그래서 일본 육군은 [[1933년]] [[4월]] 육군소년비행병(陸軍少年飛行兵, 이하 '소비') 제도를 신설했다. 모집 대상은 만 15~17세 사이의 [[청소년]]들로 3년 반 동안의 전문 교육을 마친 뒤 조종, 통신, 정비 등 각 분야의 [[하사관]]으로 임관할 수 있다. 학력 제한은 초기에는 [[보통학교]] 고등과에서, 나중에는 보통학교로 낮아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뽑힌 1기생은 [[1934년]] [[2월]] [[사이타마현]]에 있는 도코로자와 육군비행학교에 입교해서 교육받는다. 이후 항공 병력의 중요성이 더 커지자 3년 뒤인 [[1937년]] [[12월]]에는 소년 비행병들의 교육을 전담하는 [[도쿄]] 육군항공학교가 신설된다. 육군 소년비행학교에 입교하면 1년 동안 군사 교육을 받는다. 이를 수료하면 다시 [[신체검사]]를 받게 되며 적성에 따라 조종, 통신, 정비 등의 병과로 나누었다. [[적성검사]]라는 게 동그란 판에 [[사람]]을 앉혀 놓고 빙글빙글 돌리는 방식인데 통과하면 조종 분과로 결정되어 육군비행학교로 이동하여 교육받고 불합격자는 통신/정비로 간다. 기초 비행학교 이 끝나면 전투, 정찰, 폭격 등 3개 전문 분야 중 희망하는 분야를 선택한다. 속성 코스인 15기 을은 갑보다 1년 늦은 [[1943년]] [[10월]]에 [[입대]]하였다. 이들은 1년 코스의 육군 소년비행병학교에 가지 않고 바로 일본 각지의 비행학교로 흩어져 6개월 정도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비행훈련에 투입됐다. 이들은 갑 코스와는 달리, 최초 적성테스트를 통해 소년비행병 합격 여부와 분과 결정까지 되게 된다. 워낙 비행사가 많이 필요해 생긴 제도로 15기 을만 2,000명에 달한다. 인원도 많고 태평양전쟁을 겪은 마지막 기수다 보니 [[공군참모총장]] 까지 4명이나 올라갔다. [[1942년]] [[10월]]에 [[시가현]] [[오츠시]]에 '오쓰 교육대'가, [[1943년]] [[10월]]에 [[오이타현]]에 '오이타 교육대'가 추가로 생긴다. 그리고 [[1944년]] [[4월]] 각각 육군소년병학교로 승격하여 편제정원은 도쿄육군소년병학교가 3,000명, 오쓰도 3,000명, 오이타는 2,000명에 달한다. 교육기수는 18기까지는 있은 듯하다. [[안창남]]이 일본에서 2번째로 비행사 면허를 따서 [[1922년]] [[12월 10일]] 역사적인 고국 비행길에 올라 조선 팔도를 뒤흔들었는데 이는 수많은 조선 소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당시 비행학교에서 연습비가 4,500원 정도 되었는데, 소비 시험에만 합격하면 오히려 월급을 받아 가며 조종술을 배울 수 있었다. 게다가 소비의 해군판인 비행예과연습생(예과련)은 [[1930년]] [[5월]] 부터 모집했으나 조선인들을 모집하지 않아, 조선의 소년들은 소비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확인되는 조선인은 초기만 따지면 2기 이근석(조종), 6기 서한호(정비), 7기 서무갑(정비), 9기 노중신(정비), 10기 박희동(조종), 12기 임장수(통신), 강호륜(조종)등이 있으며 14기와 15기는 수십 명씩에 달한다. 그리고 이 소년이 졸업하며 다시 비행기를 몰고 한국으로 와서 고향 생가와 [[학교]]를 도는 기념 비행을 하니 이를 본 수많은 조선 소년들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해방]] 후 기준으로 소비 조종사 출신은 40명, 정비사도 40명 가량, 통신사가 30명 가량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